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르트 발트하임 (문단 편집) === 당선 이후: 국제적 고립 === 대선 출마 직전에 드러난 나치 부역 행적으로 인해 발트하임은 국내외의 온갖 비판을 받으면서 1986년 6월 8일에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제9대 대통령직에 당선되고 그로부터 1개월 뒤인 7월 8일에 오스트리아 대통령직에 취임했으나, '''[[인과응보|당선, 취임 이후에 치르게 된 대가는 매우 가혹했다.]]''' 당시 사태에서 나치 전범을 옹호하는 오스트리아 정치권의 태도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인정하기는커녕 변명과 역사왜곡, 거짓말에만 급급했던 발트하임의 [[후안무치]]한 태도에 [[네덜란드]], [[그리스]],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프랑스]], [[노르웨이]], [[덴마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유고슬라비아]],[* 발트하임이 나치군 시절 학살 등 전쟁범죄를 자행하며 군 복무를 했던 곳이 바로 과거 [[유고슬라비아]]에 속해있던 [[크로아티아]]였다.] [[영국]], [[미국]], [[캐나다]], [[스페인]] 등 [[제2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내전]] 시기 나치에게 크게 당하거나 나치와 전쟁을 치른 적이 있었던 유럽 및 서방세계의 국가들은 매우 분노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에 속해 있었던 '''[[독일]]'''과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같은 유럽의 국가들조차도 나치군 시절의 행적을 부정하려는 발트하임을 비난하거나 배척하였으며[* 이들도 추축국으로서 전쟁을 일으켜 대량학살, 인권유린 등 전쟁범죄를 자행했거나(독일,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나치 독일의 강압과 위협으로 약소국의 국가생존을 위해 추축국에 합류하던 일이 있었기에(불가리아), 나치 전범의 이력이 있는 발트하임을 결코 외교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 및 홀로코스트의 가해 원흉으로서 패전 후 국제적인 신뢰 회복과 서방세계로의 복귀를 위해 오데르강 이동 지역과 [[동프로이센]], 알자스-로렌 같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폴란드 등 [[연합국]]에게 할양된 구 독일령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매년 피해국가들에게 사과하는 등 나치 시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사과로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2차대전에서 중립국을 표방하여 나치의 침략을 받지 않고 평화를 유지했던 오스트리아의 [[이웃나라]]인 [[스위스]]와 먼 [[북유럽]] 국가인 [[스웨덴]]조차도 1986년 오스트리아 대선에서 나치 전범 전력이 드러난 오스트리아의 신임 대통령 발트하임과 정상회담을 하거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축전]] 하나 보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미국과 캐나다, 영국, 네덜란드,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비롯한 거의 모든 서방/유럽 국가들이 발트하임 부부를 공식적으로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본래 뜻은 '환영받지 못하는 자'. '외교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기피 인물' 정도로 번역되는 용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국가가 특정 외교관을 대상으로 "나 저 사람하고 상대 안한다"라고 공개 선포하는 것. 외교 협약, 특히 [[비엔나 협약]]에 따르면 강제출국의 의무는 없지만, 그 대신 외교관으로서의 특권(예: 면책)을 전부 잃는다. 외교관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으니 자국 외교관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 처분을 받으면 그 외교관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것이 관례다.]로 선포했다. 심지어 '''[[미국]]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1987년]] 발트하임 부부를 [[입국 금지|미국 입출국 워치리스트에 등록, 입국조차도 못 하도록 만들었다.]]'''[* 페르소나 논 그라타 상태라도 "[[시민]]"으로서 입출국은 이론상 가능하지만, 이렇게 워치리스트에 올려버리면 아예 입국조차도 불허된다. 1996년 제정된 미국 이민법은 나치 부역자에 대해 철저히 입국을 거부토록 규정했으며, 이 규정을 근거로 이미 미국에 체류하거나 거주중인 나치 부역자들도 모조리 추방했다. [[대한민국]]의 출입국관리법 제11조 7항에도 비슷한 규정이 있어서, 나치 전력이 있는 이 사람은 이론상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다. 해당 조항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나 그 동맹국 및 괴뢰정권 정부의 지시를 받거나 협력하여 학살이나 인권탄압에 가담한 사람의 입국을 금지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제국]]과 [[추축국|동맹 관계에 있던]] 정부 관계자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이 미국, 캐나다, 기타 서/북유럽 국가 등 서방권을 방문할 기회가 원천 봉쇄된 셈이었다. 그리고 발트하임을 겨냥한 서방국가들의 오스트리아 대통령에 대한 입국 금지 조치는 발트하임이 [[1992년]] 퇴임할 때까지 거의 5년간 지속되었는데 발트하임이 퇴임하고 토마스 클래스틸이 오스트리아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서방 각국에서는 이 입국 금지 조처를 해제하면서 발트하임 이후의 오스트리아 대통령들이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북유럽 등 서방 주요 국가들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발트하임이 대통령으로 재직한 [[1986년]]부터 [[1992년]]까지 당시 모든 서방/유럽 국가들의 대통령이나 총리, 국왕 등 그 누구 하나 대통령이 된 발트하임을 자국에 초청하거나 정상회담을 하지 않았고, 발트하임은 [[바티칸]]과 [[이라크]], [[요르단]], [[키프로스]], [[짐바브웨]], [[수단 공화국|수단]], [[니제르]] 같은 몇몇 일부 중동 및 아프리카의 국가들과 [[소련]], [[중국]] 등 일부 공산권 국가들[* 그러나 다른 공산권 국가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로 큰 피해를 입었던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 아예 적극적으로 발트하임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선포한 미국 등 서방진영 국가들만큼은 아니었지만 발트하임 대통령을 모두 입국 제한대상으로 지정하여 소련, 중국과 달리 발트하임의 자국 방문을 사실상 원천봉쇄했다.] 이외에 대다수의 서방권 주요국들을 방문하지 못 하고, 오스트리아 국내에서만 지방 순행을 하며 활동해야 했었다.[* 물론 소련과 중국도 나치 독일 등 추축국의 부역 전력이 있던 발트하임의 행적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방권 국가들과 같이 적극적으로 페르소나 논그라타로 지정하며 입국을 금지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는 오스트리아가 국제 왕따로 전락했음을 뜻하였다. 특히 [[유엔 사무총장]]까지 역임했던 고위 외교관 출신인 발트하임에게는 견딜 수 없는 굴욕이었다.[* 외교관에게 자신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영구제명|자신의 외교관 인생이 끝장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나라에서만 받아도 경력이 끝장나는 게 페르소나 논 그라타인데,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 등 서방권의 주요국가들 대부분과 (소련과 중국을 제외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공산권 국가들 모두에게 발트하임은 페르소나 논 그라타 또는 입국 제한대상으로 지정됐다. 그로 인한 파장은 발트하임 개인의 입장에서도 엄청났다.] [[1991년]] [[걸프 전쟁|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로 날아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과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미국의 [[이라크 전쟁]] 당시 후세인 정권이 붕괴된 직후에도 일부 후세인 정권 잔당 세력들과 자신의 추종 지지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도주 생활을 이어가며 자신의 옛 주군이었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이나 알리 하산 알 마지드 전 국방장관 등 나머지 후세인 정권 시기의 전직 이라크 고위층 인사들과 달리 체포, 사형되지 않으며 끈질기게 살아남는 면모를 보였다.] 전 이라크 부통령과의 협상을 통해 이라크를 탈출하지 못했던 오스트리아 국민 92명을 구해와 전문 외교관으로서의 노련함을 빛냈으나, 이듬해인 1992년 그는 대통령 선거의 재선 출마를 포기하였다. 자신의 모국인 오스트리아가 본인의 나치 전력으로 말미암아 외교적으로 서방/유럽 국가들로부터 고립이 지속되는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1992년]] [[7월 8일]]에 퇴임한 이후로는 199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기사 작위도 받는 등 나름대로 왕성히 활동했으나, 1995년 UN 창설 5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을 때에도 전직 사무총장 자격의 초청은 물론이거니와 미국 입국마저 거부당하는 굴욕은 계속되었다. 결국 미국의 워치리스트에 등록된 그의 이름은 대통령직에서 퇴임하고 [[영구제명|사망할 때까지도 삭제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